봄, 베이스 캠프를 다시 짓다
3월의 첫 햇살이 들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작년 가을에 묻어 둔 베이스 캠프를 파내는 것이다. 텐트 폴은 휘어 있고, 쇠 페그는 한두 개 사라져 있다. 그리고 매년 같은 사실을 다시 깨닫는다. 산은 그대로지만, 캠프는 매번 다시 지어야 한다.
겨울이 남긴 흔적
몬타나의 겨울은 캠프 자리를 시험한다. 작년에 좋았던 자리가 올해는 무너져 있다. 눈 무게에 가지가 부러져 텐트 그늘이 사라졌고, 흐른 물길이 평지를 갈라 새로운 도랑을 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하루가 걸린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똑같은 자리에 다시 텐트를 치다가 한밤중에 빗물에 잠기게 된다.
내가 배운 것은 단순하다. 작년의 성공은 올해의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다. 같은 위치, 같은 절차, 같은 도구라도 환경이 바뀌면 결과가 바뀐다. 야생에서는 이걸 인정하는 사람만 다음 시즌까지 살아남는다.
다시 짓는 순서
새 캠프를 짓는 순서는 늘 같다. 먼저 물 흐름을 본다. 비가 왔을 때 어디로 흘러 어디로 모이는지를 흙의 색과 풀의 누운 방향으로 읽는다. 그 다음 바람의 방향, 마지막으로 햇볕의 길을 본다. 이 세 가지가 결정되어야 텐트 폴을 꺼낸다. 도구는 가장 마지막이다. 도구를 먼저 꺼내면 도구가 자리를 정해 버린다.
물의 자리
물은 내가 통제할 수 없다. 캠프는 물이 가는 길에서 비켜서야 한다. 한 번 비켜선 자리는 두 번 비켜설 필요가 없다. 그래서 물의 자리를 먼저 정한다.
바람의 자리
바람은 방향이 바뀐다. 그래서 한 방향만 막아서는 부족하고, 등 뒤로 받칠 수 있는 자연 지형을 먼저 찾는다. 큰 바위, 두꺼운 소나무 줄기, 또는 두 그루 사이의 좁은 틈이 그것이다.
해의 자리
해는 매일 같은 길로 지나간다. 아침 햇살이 텐트 안으로 들어오는 위치를 잡으면 새벽의 추위가 짧아진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14일짜리 원정에서 새벽 한 시간의 추위를 줄이는 것은 큰 차이를 만든다.
흔적을 남기지 않는 원칙
야생의 자리에 들어갈 때 가장 먼저 배워야 하는 것은 “내가 왔다 갔다는 사실을 다음 사람이 알아채지 못하게 하는 법”이다. 미국의 야외 윤리 단체 LNT(Leave No Trace)는 이 원칙을 일곱 가지로 정리해 두었다. 사전에 계획하라, 단단한 표면 위로 다녀라, 폐기물을 적절히 처리하라, 발견한 것은 그대로 두라, 모닥불 영향을 최소화하라, 야생동물을 존중하라, 다른 방문자를 배려하라. 자세한 원칙은 lnt.org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일곱 가지 중에 사람들이 가장 자주 실패하는 것은 네 번째다. 발견한 것을 그대로 두는 것. 예쁜 돌을 주머니에 넣고, 마른 가지를 베어 모닥불에 던지고, 흔적을 남긴다. 작은 행동이지만 누적되면 길이 사라진다.
다섯 번째 원칙도 간과되기 쉽다. 모닥불의 영향을 최소화하라는 항목은 단지 화재 위험을 막으라는 뜻이 아니다. 모닥불이 남긴 검은 자국은 그 자리에서 5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 자국이 다음 캠퍼에게는 “여기는 캠프 자리”라고 말하는 신호가 되고, 결국 같은 자리에 더 많은 사람이 모이게 만든다. 한 번의 모닥불이 한 자리의 미래를 결정한다.
캠프는 사람의 거울
한 사람이 친 캠프를 보면 그 사람의 일상이 보인다. 텐트가 비뚤어져 있으면 결정이 흔들리는 사람이고, 도구가 따로따로 흩어져 있으면 우선순위를 정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반대로 캠프가 정돈된 사람은 야생에서도 자기 자신을 잘 다스린다. 캠프는 사람의 마음 상태가 가장 정직하게 비치는 거울이다.
이건 일상의 작업 자리에서도 같다. 자기 책상을 어떻게 정리하는가가 그 사람의 결정 패턴을 보여 준다. 서류가 흩어진 사람과 서류가 줄을 맞춘 사람은 의사결정의 호흡도 다르다. 캠프에서 익힌 정돈의 습관은 산을 떠난 다음에도 그대로 작동한다.
아침의 한 시간
새 캠프를 짓고 난 첫날 아침의 한 시간이 가장 중요하다. 그 한 시간 동안 캠프 안의 모든 도구의 자리를 손이 외운다. 칼을 어디에 두었는가, 라이터를 어느 주머니에 넣었는가, 식수통이 어느 방향에 있는가가 손에 새겨진다. 이 새김이 끝나야 비로소 사냥터로 나갈 준비가 된다.
이 작업을 빨리 끝내려는 사람일수록 시즌이 길어질수록 작은 사고를 자주 일으킨다. 칼을 찾느라 손가락이 베이고, 라이터를 못 찾아 모닥불이 늦어진다. 시즌 초의 한 시간이 시즌 전체의 무게를 정한다.
오늘의 베이스 캠프
나는 매년 봄 같은 일을 반복한다. 어쩌면 다른 일을 해도 될 만큼 오래 다닌 자리들이지만, 매번 처음 들어가는 자리처럼 다시 본다. 익숙함이 가장 위험한 적이다. 익숙함은 봄에 무너진 도랑을 못 보게 만든다.
익숙함을 다루는 가장 좋은 방법은 첫 시즌 노트를 다시 꺼내 읽는 것이다. 처음에 적어 둔 메모는 늘 단순하지만 그 단순함 안에 핵심이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노트는 두꺼워지고, 두꺼워진 노트 안에서 가장 처음의 단순한 한 줄을 다시 찾아내는 일이 봄마다의 작업이 된다.
이 시리즈의 출발점이 되는 한국어판 큐레이터 노트의 사정은 About Roland에 따로 정리해 두었다. 글의 자료 정책과 검토 절차는 Editorial Standards에 명시되어 있다. 작년 9월에 적었던 베이스 캠프 노트는 이 글에 남아 있다.
매 봄마다 되새기는 세 가지
- 작년의 자리는 올해의 자리가 아니다.
- 도구보다 먼저 환경을 본다.
- 흔적을 남기지 않는 사람만 다음 봄에 다시 들어갈 수 있다.
캠프는 사람을 비추는 거울이다. 봄마다 거울을 다시 닦는다.